학원복음화협의회

라일락 헌정 글 _ 장지혜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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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학복협 작성일16-04-27 16:20 조회812회 댓글0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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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"어? 방금 뭐였지?"

 5년간 에콰도르에서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맞는 봄. 어색하기만 한 고향에서, 익숙하지도 않은 동네에서, 괜히 쓸쓸한 마음에 집 앞 대학 캠퍼스만 들락거렸다. 마침 사촌오빠가 그 학교 직원이라, 오빠에게 빌린 출입증으로 도서관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다. 대학 입시까지는 반년이 남았고, 입학까지는 거의 1년이 남아있었다.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그 낯설고 불안정한 시기를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주었던 게 그 출입증이었고 그 도서관이었다. 그날도 똑같았다. 도서관에서 지금 에콰도르 친구들이 한창 읽고 있을 책을 찾아다니며 그리운 벗들에 대한 마음을 달랬다. 이렇게 책을 찾는 것만으로도 꼭 그네들 곁에 있는 것 같았다.

 지금 발을 딛고 있는 캠퍼스 풍경이나 마음속으로 그리는 에콰도르 풍경 그 어느 곳에도 온전히 녹아들지 못한 채, 터벅터벅 도서관 앞 언덕을 내려가 집으로 향했다. 나무라곤 은행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던 삭막한 동네 속 오아시스처럼 녹지가 가득한 캠퍼스였지만, 한없이 외롭고 울적하기만 하던 내게 그 푸름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. 문득 바람이 스쳐지나갔다. 어디서 맡아 본 향기다. 기억이 나지 않는다.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그리운 냄새다.

 "어? 방금 뭐였지?" 분명 어디에서 맡아본 적 있는 향긴데. 캠퍼스 가득한 철쭉꽃 내음이라고 하기엔 비누 향처럼 묵직했다. 향수를 잔뜩 뿌린 누군가가 지나갔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, 가로등과 나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. 다시 맡아보고 싶었다. 바람이 다시 불기만을 기다렸다. 어정쩡하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몇 분 기다리자, 바람이 살랑, 하며 그 향내를 다시 실어다 주었다. '이번엔 꼭 무엇인지 밝혀내야지!'하며 바람이 불어온 곳을 찾아 가보았더니, 우거진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 작디작은 나무 한 그루가 수줍게 숨어있었다. 그득한 꽃으로 위용을 뽐내고 있는 모습도 아니었다. 처량하리만큼 빈약한 보랏빛 꽃송이 두세 개 정도가 겨우 고개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. 5년 만에 다시 만난 라일락이었다.

 나는 분명히 기억한다. 미아처럼 뱅뱅 돌고 있던 날 궤도에 다시 올려놓은 것은 우울하고 무료한 내 일상을 채우고자 구했던 아르바이트도, 새로 사귄 친구도 아닌, 그때 그 라일락 향기였다. 그때 그 숫기 없던 라일락나무가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. "잘 돌아왔어. 그래도 널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내가 여기 있잖아." 그때였을 것이다. 서먹하기만 하던 서울 하늘과 화해를 한 것이. 미워하기만 하던 서울 바람을 반기게 된 것이.

 이로부터 1년이 지나고, 재밌게도 난 그 학교 학생으로 캠퍼스를 거닐게 됐다. 중간고사 기간 즈음 도서관이 답답해지면, 그때 그 자리로 달려가 기다렸다. 바람이 찾아오기만을. 그때 그 라일락 향기가 내게 가져다줬던 위로를, 마중을, 그리고 고향을.

 

장지혜(아름마을교회)

"백수라는 변방의 위치를 마음껏 탐구하고 있는 중. 변방은 창조공간이라는 말과 건강한 백수는 이 시대 생태계 복원을 위한 창조주의 모략이라는 말을 굳게 믿으며 버팅기는 중이다."

jkayjang@gmail.com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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